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자이 돌격 (문단 편집) === 명령도 불합리해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 === 무능한 지휘관이 계급장만 앞세워서 [[까라면 까]]로 밀어붙일 때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같은 [[추축국]]이던 [[독일군]]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대판 싸워서 작전을 수정하거나 취소시키는 경우가 있었으며, 설령 그 명령이 관철되더라도 [[임무형 지휘체계]]를 이용해 현장에서 영 불가능하다 판단되면 재량권으로 요식행위로 좀 하다 말거나 자의적으로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몇몇 반나치 인사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훗날 비난을 면하거나 의인이라고 칭찬받기도 했다. 특히나 전쟁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베를린 사령부도 맛이 가기 시작하여 전선에서 야전 지휘관들이 죽자사자 싸우는 동안 히틀러와 그 측근들은 거짓 보고와 망상, 자기합리화에 근거한 상상 속의 전쟁을 하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을 쏟아냈기에 명령을 따를 래야 따를 수가 없었다. 완전히 궤멸된 부대를 동원하여 한참 진격 중인 적을 막으라거나 부상자 뿐인 부대에게 역습을 지시하거나, 당장 정신없이 전투 중인 장군더러 전방 지휘소를 후퇴시킨 것이 확인되었으니 군사재판에 출두하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런 독일과는 달리, '''일본군은 명령 불복종은 하기 힘든 구조였다.''' [[총알받이|명령을 회피하려면 누군가 총대를 메야 하는데]] 일본군은 그런 행위를 하면 [[사형|사실상 취급이 안 좋다]]. [[기무라 마사토미]] 같은 일부 개념잡힌 일본군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는 기체 고장'''이라느니 하는 핑계로 명령불복종을 하긴 했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다. 그리고 [[가미카제]]의 경우도 예외적으로 특공 대신 통상공격을 한 부대도 있었다. 일례로 [[시가 요시오]] 휘하의 [[343 해군항공대]]가 있다. 사실 가미카제는 전쟁을 사무라이 소설로 배운 대본영의 정치군인들과 어차피 남 얘기인 육, 해군 장교들이나 환장하고 좋아했지 일선 항공대 지휘관들은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들을 자살로 몰아 넣느라 죽을 맛이었다. [[좌천|목]]이 [[사형|물리적]]으로 날아가게 생겼으니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윗대가리 덕분에 죽어나간 병사들이 불쌍할 정도다. 이런 일본이라도 근대화 시절에는 정말 매우 진보적인 경향이 있었는데, 제국주의를 시작하면서 갑자기 보수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제1 차 세계 대전에 협상국측으로 참여했지만 적극적인 전쟁 참여보단 빈집털이에 집중한 상태로 승전국으로 종전 했고, 전간기에는 전쟁에서 매우 많은 피해를 본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일본만은 여전히 제1 차 세계 대전 수준에 묶여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해군은 그나마 경력이 있기 때문인지 타국보다 진보적이였던 항공모함 중심의 해군 교리를 채택했지만, 전쟁에 돌입하면서 보수적인 이유로 전함 중심 교리로 순식간에 주도권이 넘어가버린다. 타지에서 소식이나 무전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동남아시아에서 항복소식을 받지 못해서 1948년 정도까지 싸운 일본군도 있다. 결국 이 정신나간 지휘 체계는 반자이 돌격에도 적용되었다. 휘하 장병들의 생존률을 결정하는 데는 지휘관의 역량이 지대하다는 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돌격 개념이 전쟁이 가면 갈수록 점점 비정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는 '''장교나 장군들의 교육과정이 정신교육을 중시하고 전근대적인 공격 일변도 전투교리를 가르치는 등 제대로 된 게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 전쟁 초에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장교들이 전사하거나 해임되고 전쟁 중~후반에 저따위 교리를 몸에 익힌 장교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전체적인 장교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이런 장교들 밑에 있던 병사들은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게 되었고, 이게 이어지다보니 결국엔 총소리만 나면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다같이 반쯤 [[멘탈붕괴]]한 상태에서 반자이 돌격을 하게 된다. 반자이 돌격의 효율은 결국 장교의 질적 문제와 연관 있다는걸 보여주는 전투가 상당히 있다, 전쟁 중-후반에도 살아남은 일본군 장교 일부는 반자이 돌격이 비효율적인 전술이라는 걸 알고 자제 시키거나, 기존 방식을 폐기하고 [[펠렐리우 전투|굉장히 효율적으로 쓰기도 했다.]] 결국 패배하는건 똑같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이 평소보다 급상승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전투는 [[이오지마 전투]]로, [[쿠리바야시 타다미치|사령관]]이 직접 반자이 돌격을 금지시켰을 뿐인데 이전과 달리 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이 전투와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고,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는 [[몰락 작전|일본 본토 상륙 계획]]에 [[핵무기|가능한 모든 화력]]을 쏟아부은 후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 걸 기본 전제로 깔았을 정도이다.[* 다만, 다른 시각도 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처럼 미군 수뇌부는 일본인들 중에서는 무고한 민간인이란 게 더 이상 없다고 봤기에 핵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애초에 [[커티스 르메이|저 양반]]은 [[도쿄 대공습|도쿄에 소이탄 도배]]를 명령한 본인이며 '''"대체 왜 최고 사령부는 [[히로시마시|히로시마]]와 [[나가사키시|나가사키]], [[코쿠라시|고쿠라]], [[교토시|교토]]에 폭격을 못하게 하냐!?"'''며 육군부 장관에게 격렬한 항의를 하던 인물이다. 참고로 상기한 네 도시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원자폭탄|결과물]]을 실전에서 실험하기 위해 통상 폭격 대상 도시 목록에서 일부러 빼둔 곳들로서, 그렇게 정해지고 나서 교토만은 육군부 장관에 의해 핵무기를 이용한 폭격대상에서도 유일하게 빠졌다. [[리틀보이|첫번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히로시마에 실험한 이후, 고쿠라 역시 [[맨해튼 프로젝트]] 중 [[팻맨|두번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의 실전 실험 대상 도시였으나, 폭격 당일 기상 문제로 인해 빠지고 나가사키가 두번째 실험대상 도시가 된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러한 엄청나게 빡신 규정이 항상 일관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장교끼리 같은 파벌에 속한 경우에는 도리어 지휘 체계가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 중일전쟁 당시 위관급이나 영관급밖에 안 되는 장교들이 독단적으로 공세를 시전한 예시가 넘쳐난다. 문제는 중일전쟁 자체도 [[무타구치 렌야|그분]]의 [[루거우차오 사건|독단적인 공격]]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명령에는 항의할 수도 있지만, 정당한 명령이라면 복종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일본군은 정 반대로 실행했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저렇게 상부의 명령도 없이 독단적으로 공세를 감행한 이상 결과가 어찌되던 간에 강력한 징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나, 당시 일본의 장교진은 같은 파벌에 속한 사람끼리는 저런 막장짓을 하고도 좋게좋게 다 넘어가 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